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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a life, LPN

캐나다이민스토리 11년차 1편-이민병의 시작부터 이민초기 2년까지

by 쵸코박스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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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이민 온 지 11년 차, 이민을 결심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나의 이민생활을 돌아보았다. 해외 이민, 특히 캐나다 이민, 간호사, 용접사 이민에 관심이 있거나 준비하고 있다면 조금이나 도움이 되길 바라보면서 그동안의 좌충우돌, 여러 경험들을 시간순서에 따라 세편에 나누어 올려본다.

캐나다 이민의 시작 

사실.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기까지 이민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호주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권유가 계기가 되어 이민정보를 찾아보았고, 남편이 당연히 반대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다르게 이민에 동의했고, 그렇게 이민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민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게 영어였고, 그렇게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호주에서 캐나다 이민으로 전향, 전문인력이민으로 영주권을 따기 위해 아이엘츠 시험 준비를 시작해 10번의 시험 끝에 필요한 점수를 만들고, 모든 서류를 만들어 접수 후  영주권 레터를 받기까지, 총 3년이 걸렸다. 그리고 우리는 캐나다영주권이 나온 시점에서 정확히 9개월 후에 캐나다 밴쿠버에 랜딩을 했다. 

 

 

 


이민초기 ; 랜딩부터 ~3개월 , 설레임은 오래가지 않더라


밴쿠버에 랜딩후 약 1주간 관광을 하고 우린 우리의 정착지인 에드먼턴으로 왔다. 와서 한 달간은 운전면허증, 헬스케어 카드등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조그마한 투베드룸 아파트를 1350불에 렌트하고, 딸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고 등록하는 등의 일로 바빴다. 날이 갈수록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하던 마음은 줄어들고 불안과 걱정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슨 용기였나 싶었을 정도로 적었던 초기 정착금 3천만 원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져 갔다. 자동차 없이 살기 힘든 이 도시에서 오자 마자 구입해야 했던 20만 킬로 넘게 탄 3000불짜리 중고차를 샀고, 이제 갓 이민을 왔기에 크레디트가 없는 탓에 3개월치 아파트 렌트비를 미리 내야 했다. 그리고, 소소하게 필요했던 가구, 가전 필요용품 들을 좀 사고 나니 온 지 두 달도 안 돼서 2천만 원도 않남았었다. 이러다 우리 셋 다 굶어 죽는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때쯤 다행스럽게 남편이 취직을 했다. 이민을 결정했을 때 남편이 동의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남편이 예전에 용접을 했었던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 이민준비를 할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3년간 용접일을 다시 했었는데  그 덕분에 취직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에드먼턴 오자마다 Journeyman이라고 용접사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했고, 취직 시에도 취직시험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이민 온 지 두 달 만에 시간당 34불 + 2불 shift differential을 받는 나이트 쉬프트 용접사로 일을 시작했다.

 

3개월~ 1년 2개월

남편이 일하느라고 바쁜 동안, 나는 7살 딸아이를 챙기느라고 바빴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채로 캐나다 학교를 다녀야하는 딸에게 화장실 가고 싶으면 "washroom"이라고 말하라고 가르쳐주고 데려다주었던 첫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딸아이는 첫 한두 달간 영어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어느새 친구들과 영어로 얘기하며 놀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학교 다녀오면 학교에서 제공해 주었던   " Raz-kids" 사이트에서 영어로 된 짤막한 스토리 북들을 적어도 한 시간에서 3시간까지 듣고, 읽고, 따라 녹음하기를 매일매일 빼먹지 않고 시켰다. 그랬더니 금세 영어책을 좋아하게 되고, 잘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나는 new comers를 지원해 주는 기관에 가서 영어레벨테스트를 보았고, 이민자들을 위한 무료 영어클래스에 등록을 해서 다니게 되었다. 아이엘츠 공부를 했던 덕에 시험에 강해져서 그런가 가장 높은 레벨을 받았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아이가 학교가 있는 동안 할 일도 없었고, 시험 말고 현실 영어 말하기 듣기에 자신감이 전혀 없었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랜딩 후 세 달 후 아이엘츠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보았던 시험에서 다행히 널싱스쿨 입학에 필요한 아이엘츠 점수를 받았고, 그 다음 해 1월에 시작하는 LPN과정에 지원해 시작하기로 했다. 1월 시작이기에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고, 나는 되도록 딸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재스퍼, 밴프 관광도 하고, 여기저기 캠핑도 다니는 등 그렇게 캐나다 생활에 적응해 갔다.

 

1년2개월~ 2년

그러다가 2014년말 쯤에 국제유가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알고 지내던 주변사람들 중 용접사였던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오프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집 이야기는 아니기를 바랐지만, 남편은 다음 해 1월 말에 레이오프 레터를 받았다. 곧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다른 일을 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Employment Insurance) 고용보험을 신청해 버티기로 했다. 나는 이미 널싱스쿨에 입학한 이후였고, 풀타임으로 학교에 다니느라고 바빴다. 게다가 1년 반을 산 아파트는 정말 살기가 너무 불편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었는데, 렌트를 구하다가 구하다가 못 구해서 결국 집을 사기로 해서 이미 다운페이를 해 놓았던 터였다. 남편의 레이오프 때문에 혹 은행에서 모기지 승인이 나지 않고, 이미 지불한 다운페이가 날아갈까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모기지 승인이 나고, 이사도 했다. 남편은 잡마켓이 너무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당분간 영어를 공부하고 용접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첫 학기의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정말 매일이지 학교 가는 게 곤욕이었다. 영어도 힘들고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황들이 이어졌고, 나는 한 학기 수업을 듣고는 Drop out 하기로 결정했다. 다음학기 등록금도 걱정이었는 데다가 내 마음과 몸이 버텨주질 않았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지만,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잠시 쉬고 돌아와도 된다는 말도 뿌리치고, 그냥 자퇴를 했다.물론 나중에 엄청 후회했지만.. 그리고, 우리의 통장은 빠른 속도로 비워져 갔고, 나는 매달 모기지를 낼 때가 다가오면 내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이었고, 언젠가 한 번은 데빗카드 하나만 가지고 그로서리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는데 통장에 남아있던 돈이 모잘라 계산대에 가지고 왔던 물건들을 그대로 반납한 적도 있었다. 그날 어찌나 서럽고 슬픈지, 다 접고 다시 한국으로 갈까를 수십 번 생각했었다. 그렇게 설렘 가득하게 시작된 캐나다 이민 생활은 어느새 하루하루 버티는 길고 외로운 싸움으로 변해갔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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